살림과 일상
왜 지금, 다시 영성 훈련인가? 본문
왜 지금, 다시 영성 훈련인가?
오늘날 교회가 겪고 있는 위기의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예배당은 여전히 사람들로 붐비고, 프로그램도 끊이지 않지만, 신앙의 깊이와 삶의 변화는 점점 더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저자는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재해석'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그 하나님을 삶 속에서 '재현'하고 있는가?”
이 물음은 단순히 개인의 경건 생활을 넘어, 교회의 존재 이유와 신앙의 본질을 재정의하게 만듭니다. 오늘 우리가 다시 ‘영성 훈련’을 말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 재해석을 넘어 재현으로: 영성 훈련의 소명
이 책의 저자는 오랫동안 성경을 새롭게 해석하는 데 집중해 왔습니다. 세미나, 강의, 집필을 통해 진리를 재해석하는 일에 헌신해 왔지만, 결국 ‘재해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깊은 자각에 이르렀습니다.
성경의 진리는 삶 속에서 실현되어야 비로소 그 힘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실현, 즉 **‘재현(再現)’**을 위한 훈련이 바로 영성 훈련입니다. 이는 단순한 프로그램이나 묵상 훈련이 아니라, 삶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 다시 조직되고, 새롭게 순종하게 되는 거룩한 재편성의 과정입니다.
🔸 전통 수도의 뿌리: 헬레니즘적 금욕주의
그렇다면 과거의 영성 훈련은 왜 실패했을까요?
중세의 수도원 운동은 세속을 떠나 금욕과 고행을 통해 하나님과 합일을 추구하는 길이었습니다. 이 운동의 중심에는 안토니우스, 사막의 교부들로 대표되는 수도사들이 있었고, 그 전통은 가톨릭 영성의 정수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출발점이 성경적 복음이 아닌, 헬레니즘 철학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플라톤의 이원론, 즉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는 사상은 정화→조명→합일이라는 3단계 구조 속에 그대로 스며들었고, 인간이 먼저 육을 억제하고 스스로 정화함으로써 신적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는 자력구원의 논리로 발전했습니다.
🔸 ‘자력 수도’의 헛고생: 루터의 절망
이러한 자력 수도의 한계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 인물이 바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입니다. 그는 누구보다 철저한 수도사였습니다. 금식, 기도, 고행을 통해 자신의 죄를 없애고자 했지만, 구원의 확신은커녕 하나님의 진노와 자기혐오만 깊어졌습니다.
그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복음을 재발견하기까지, 그는 수년간 자력구원의 한계에 절망하며 “헛고생”의 본질을 몸소 증명한 셈이었습니다.
🔸 성직자만의 길이 아닌, 모든 이를 위한 영성
전통적 수도는 평신도에게는 감히 도달할 수 없는 ‘엘리트의 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탈속, 금욕, 은둔은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너무 멀고도 비현실적인 영성입니다. 그 결과, 영성은 성직자의 전유물이 되었고, 평신도는 구경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말한 하나님 나라는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나라였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특정한 장소와 직분이 아니라, 삶의 자리 한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 수도원의 실패: 천 년의 관상기도와 거의 없는 결실
역사가 말해줍니다. 중세 수도원들이 1,000년 동안 수많은 수도사들을 양성했지만, 관상기도에 성공했다는 인물은 손에 꼽습니다. 너무나 미미한 성과에 결국 가톨릭 내부에서도 자성과 포기가 이어졌고, 많은 수도회는 관상기도를 현실적으로 포기하고 실천적 봉사로 방향을 틀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출발부터 잘못된 영성 지도의 한계를 드러내는 역사적 증거입니다.
🔸 새로운 여정을 위한 첫 질문
그래서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디에서부터 길을 다시 찾아야 하는가?”
그 해답은 더 많은 열심도, 더 특별한 체험도 아닌, 바른 이해에서 출발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있습니다.
바른 지도 없이 떠난 여정은 결국 길을 잃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찾아오시는 ‘타력 수도’의 여정을 통해, 다시 살아 숨 쉬는 영성의 길을 걸어가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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