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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의 설계자 정도전, 왜 대원군 시기에야 복권되었을까?

2025지속가능네트워크 2025. 2. 23.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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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설계한 개국공신이자 성리학적 국가 이념을 확립한 정도전(鄭道傳)은 조선 건국 후에도 강력한 개혁을 추진했지만, 태조 이성계의 뒤를 이은 태종 이방원에 의해 제거되었다. 이후 그는 역적으로 규정되어 오랜 세월 동안 불명예 속에 묻혀 있었지만,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시기에 이르러 복권되었다. 그렇다면 왜 400여 년이 지난 대원군 시기에야 정도전이 복권되었을까? 그 복권을 주도한 인물은 누구이며, 명분은 무엇이었을까?

1. 정도전의 정치적 몰락과 오랜 평가 절하

정도전은 조선 개국 과정에서 이성계를 적극적으로 보좌하며 신진 사대부 중심의 유교 국가를 설계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태조 이성계의 후계 구도에서 이방원이 아닌 이성계의 여섯째 아들 방석을 지지하며 세자 책봉을 주도했고, 이는 방원의 반감을 샀다. 결국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에게 제거되면서 역적으로 몰렸다. 이후 조선의 주도권을 잡은 태종 이방원은 정도전의 정책을 대거 수정하고, 그의 명예를 철저히 훼손했다.

조선 후기에도 정도전은 '역적'이라는 평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성리학적 질서를 강조한 사림(士林)들은 태종 이후의 정통성을 중시하며 정도전의 개혁적 성향과 왕권 견제 사상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의 개혁 이념이 지나치게 급진적이었다는 점도 이유였다. 조선 후기 사대부들은 왕권보다는 사대부 중심의 정치 운영을 강조했는데, 정도전의 개혁 노선은 강력한 국왕 중심의 유교적 국가관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도 정도전에 대한 복권 논의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

2. 대원군 시기 정도전 복권의 배경

조선 말기로 접어들면서 사회는 큰 변화를 맞았다. 특히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이 섭정하던 1860년대는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움직임이 강하게 나타난 시기였다. 이 시기에 정도전이 복권된 이유는 다음과 같은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1) 흥선대원군의 왕권 강화 정책과 정도전의 재조명

흥선대원군(이하 대원군)은 철종 사후 고종을 즉위시키고 섭정을 하면서 강력한 왕권 강화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당시 외척 세력과 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한 세도 정치 세력을 제거하고, 국가의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대원군은 정도전의 개혁 사상을 재조명했다.

정도전은 조선 개국 초기부터 사병 혁파를 주도하고, 신권(臣權)을 견제하는 강한 왕권을 강조한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중앙집권적 국정 운영을 구상하며, 재상 중심의 정치를 통해 왕권을 보좌하는 체제를 만들고자 했다. 대원군은 이러한 정도전의 정치 이념을 자신의 개혁 방향과 유사하게 보았으며, 정도전을 복권함으로써 자신의 개혁 정책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2) 당시 조선의 국학(國學) 연구와 역사적 재평가 분위기

19세기 후반에는 조선의 역사를 재해석하려는 흐름이 있었다. 실학의 영향으로 역사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정도전의 사상과 정책이 다시 조명되었다. 기존의 주류 성리학과 다른 관점에서 조선을 바라보려는 시도가 이어졌고, 정도전의 개혁적 면모가 긍정적으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3. 정도전 복권을 주창한 인물과 명분

(1) 복권을 주창한 주요 인물

정도전 복권은 대원군의 강력한 주도로 이루어졌지만, 당시 국왕이었던 고종(高宗)과 학자들의 지지 또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박규수(朴珪壽) 같은 개혁 성향의 실학자들은 정도전의 개혁 이념이 조선 말기의 쇄국적 분위기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조선 후기 성리학적 질서에 대한 비판이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 나오면서, 정도전이 단순한 역적이 아니라 조선을 세운 개국 공신이라는 점이 강조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도전의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과 같은 저서도 다시 평가받으며, 그의 정치 철학이 주목받았다.

(2) 복권의 명분

대원군과 학자들은 정도전 복권의 명분을 다음과 같이 내세웠다.

  1. 조선 개국의 설계자로서 정도전의 역사적 공로 인정
    • 정도전은 조선 왕조의 법과 제도를 정비한 핵심 인물이었으며, 그의 업적을 부정하는 것은 조선 개국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2. 왕권 강화의 정당성 확보
    • 대원군이 추진하던 중앙집권 정책과 정도전의 정치 철학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정도전의 복권을 통해 자신의 정책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3. 조선 후기 성리학 중심의 보수적 정치 질서에 대한 비판
    • 정도전은 초기 조선에서 보다 현실적이고 개혁적인 통치를 추진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 당쟁과 세도정치로 인해 국가가 피폐해진 상황에서 그의 개혁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는 논리가 형성되었다.
  4. 실학적 역사관과 조선 개혁의 필요성
    • 19세기 실학자들은 조선 사회의 변화 필요성을 강조하며 정도전의 개혁 사상을 조선 말기 개혁의 모델로 삼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4. 복권 이후 정도전의 역사적 위상 변화

대원군 시기의 복권 이후, 정도전에 대한 평가는 점차 긍정적으로 변해갔다. 이후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정도전은 '개혁가'로서 재평가되었으며, 해방 이후 대한민국에서도 정도전은 '조선의 설계자'로 자리 잡았다. 현재 정도전은 조선의 개국을 이끈 핵심 인물로 인정받고 있으며, 그의 정치 철학과 개혁 정신은 현대 한국사에서도 중요한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5. 맺음말: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정도전의 평가

정도전은 조선 개국을 주도하고 국가의 기틀을 다졌지만, 태종 이방원에게 제거된 후 오랜 세월 역적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19세기 흥선대원군의 개혁과 왕권 강화 정책 속에서 그의 정치 철학이 재조명되면서 복권이 이루어졌다. 당시 대원군을 비롯한 개혁적 학자들은 정도전의 개혁 정신을 현 상황에 적용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그의 복권은 조선 후기 정치적 변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정도전은 시대에 따라 평가가 크게 변한 인물이다. 왕권 강화의 모델로서, 개혁의 상징으로서, 또는 당대의 희생자로서 그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논쟁과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정도전의 복권
정도전의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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